4R
걱정은 미리 해봐야 좋을 게 없다.
어차피 찾아올 걱정 그냥 좀 더 즐길걸.. 이라는 생각은 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2라운드는 테종이가 있었으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2라운드 끝나는 순간도, 3라운드 끝나는 순간도 두번연속 경연 녹화 끝나는 순간 부터 다음 라운드 걱정 한가득 배부를정도로 했다. 혹시 5라운드 진출 한다면 그때는 미리 걱정 하지 않기로. 삼세번은 국룰이니까.
이번엔 조별 미션이란다. 이러나저러나 준비 방식은 지난 라운드와 같다. 솔로 곡을 잘 골라서 잘 편곡하고 잘 노래하기.
그러기 전 우선 달리러 나가본다. 올여름부터 매일 달려보려 노력했다. 2라운드와 3라운드 준비하면서 거의 작업실에만 있어서 3라운드가 끝난 날 밤엔 달리러 나갔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분위기는 좋은데 러닝코스 위를 가득 덮어버린 뭉개진 은행 열매를 피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헬스장을 등록했다. 나중에 따뜻해지면 다시 밖에서 뛰어야지 흐흐. 뛰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피가 도니까 머리도 맑아지고 노래를 위한 호흡을 연습에다 폐활량도 같이 신경 쓸 수 있다. 일석사조. 캬.
하지만 맑은 머리에도 선곡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 선곡 방식은 전략을 조금 바꿔봤다. 다양하게 많이 불러보기보다는 기다림처럼 느낌이 오는 노래 몇 곡만 깊이 있게 편곡을 해보는 전략이다.
후보 1. 볼빨간 사춘기 – 여행: 듣다 보니 왠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밤새 편곡을 해봤으나 실패.
후보 2. 최백호 – 바다 끝: 듣다 보니 왠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밤새 편곡을 해봤으나 실패.
하아. 3라운드처럼 어떻게든 만들어지겠지, 생각하며생각하며 무작정 달려들었으나 나의 될 것 같은 이 기분은 아직 명중률이 낮았다. 내 감의 통계가 쌓일 때까진 내 감을 계속 의심하기로.
그렇게 며칠 동안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편곡하고 MR을 제출해야 하는 날짜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 선곡도 제대로 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3라운드 때 추천받았던 곡이 기억났다. 넬의 ‘지구가 태양을 네 번’. 이걸 해볼까…. 일단 일반적인 가요 멜로디 흐름은 아니고 약간 팝 같은 묘한 느낌이 있는데. 내가 잘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왠지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록 앞 두 번의 감은 틀렸지만 한 번 더 나의 감을 믿어보기로 한다. 삼세번은 국룰 아닌가.
“작가님, 저 이 곡 해볼게요. 땅땅. 컨셉은 인터스텔라에요. 지구가 태양을 돌아야 하니까. 의상은 우주복으로…하하하”
이미 선곡도 엄청나게 늦은 시점 기다리다 지친 작가님은 나의 농담 아닌 농담을 받아주지 않으셨다. 무섭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이렇게 낙천적인 성격이었던가 하하!. 모르겠고, 일단 능력자 1호 3호를 소환해 본다. 바쁜 시간 급히 빼주신 분들에게 일차적으로 편곡의 도움을 받은 후 고기를 맛있게 사드리고 홀로 후반 작업을 위해 작업실을 향해 간다.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가장 효율적으로 편곡과 녹음 믹스를 끝내야 한다. 다행히 1호 3호를 만난 당일 밤에 혼자 작업을 하며 곡의 초중반 부분에 대한 사운드와 그림을 잡을 수 있었다. 일단 다음날 주호에게 제대로 된 드럼 녹음을 받아본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해보고 방향을 찾아간다. 문제는 후반 부분에 있었다. 정해 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녹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방향들의 리듬을 받아가기로 한다. 한참을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들에 대한 토론과 이야기를 하며 녹음을 받는다. 저녁 전에 녹음을 끝내고 바로 하진이네 작업실로 출발.
주호네 집 가기 전. 하진이에게 연락을 미리 했었다.
“하진아, 나 싱어게인 해.”
“형이요? 또? 대단하다!”
”그러게 말이야. ㅋㅋㅋ 혼자 하니까 좀 외로워. 너희랑 했을 때가 몸은 힘들어도 재밌었는데. 그나저나 오늘내일 너 바쁘냐. 나 한스짐머 같은 사운드가 필요한데 내가 지금 소스가 없어.“
”아, 일이 조금 있는데 저녁부터는 괜찮아요“
옳다구나. 곧바로 약속을 잡는다. 오늘 저녁과 다음날 하루 종일. 맛있는 거 아주 맛있는 거를 사줘야겠다. 그리고 지완이한태도 전화했다. 지완이도 와준단다. 천사들 같으니.
지완이와 하진이는 슈퍼밴드에서 여러 번 경연을 함께 했었는데 이 둘의 삶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었다. 둘이 알고 있는 음악의 방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의 태도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생각을 했고 그렇게 슈퍼밴드 방송 이후에 꾸준히 좋아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친구들과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나름 나 이렇게 발전했다는 거 보여주는 느낌…은 나만 혼자 생각했다 ㅋㅋ
내가 만든 편곡을 들려주려니 조금 쑥스러웠지만 칭찬해 주니 기분 좋았다.
”가사에 지구가 태양을 네 번 감싸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말 그대로 소리가 듣는사람을 감싸듯 하지만 한없이 넓은 그런 사운드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소스가 내가 없어서…. 뭐 할만한 거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후반부 터지는 구간을 어떤 식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어. 뭔가 분명히 갈 수 있는 길이나 공간은 있는데 그게 무슨 감정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아직 잘 모르겠네….”일단 문제점들 해결해야 할 부분들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한다.
“슈게이징 어때요?” 하진이와 지완이의 아이디어. 역시. 혼자 생각했으면 삼일 아니 일주일 걸렸을지도….
슈게이징은 기타를 칠 때 신발(shoe)만 바라보면서(gazing) 기타를 친다고 해서 생기는 이모(emo) 계열의 록 장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아주 좋아했던 장르 중에 하나라 볼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록을 참 좋아했다. 내가 크면서 들었던 음악들의 주된 장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2010년대 록이 우리나라 에선 비주류가 되어서 한국에서 음악을 하면서 이런 장르를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렇게 나의 사심을 경연에서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연이니까. 그리고 이게 나니까. 일단 내 느낌에 좋은 것을 최선을 다해보기로 한다.
“좋다! 가자!”
이런 장르에 통달한 지완이가 이래저래 기타를 쳐본다.
“더 거칠게 가자 지완아. 너무 좋다. 그래 이거 같아“ 편곡하며 한 줄기 빛을 본다.
그렇게 진주 누나의 피아노를 기반으로 내가 구성과 사운드의 분위기를 잡고 그 위에 주호의드럼과 지완이의 일렉 그리고 하진 이의 믹스와 베이스가 합쳐져 엠알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갔다.
수많은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엠알을 마무리할 찰나 3라운드 이후로 나의 일렉기타 선생님이 된 동은 이에게 이번 라운드 어떻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할지를 보여줬다. 후반부 기타가 터지는 부분이 좀 더 아쉬워서 동은 이의 기타 소스를 몇 개 더 추가하고 MR을 완성. 유통기한 늘리려다 수명이 주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며칠 안 남은 경연을 위해 본격적으로 노래 연습을 시작.
원래 후반부 터지는 구간을 한 호흡에 불러보려 했었다. 3단 고음보다는 6단 변속기 정도랄까…. 조금 과한 것 같다는 피드백이 있었다. 그래서 중간에 잠깐 숨을 쉬고 다음 터지는 구간을 부르는 게 더 임팩트가 있었다. 신기했다. 무언가를 전달할 때 마냥 강한것이 좋다기 보다는 잠깐의 호흡이나 침묵이 그 다음 구간의 외침을 더 호소력 있게 만든다는 거.
리허설을 잘 마치고 집에 와서 마지막으로 또 연습을 해본다. 3라운드와 비슷했다. 편곡에 대한 백 퍼센트 확신이 있진 않았지만 이대로 부르면 내가 나를 다 담을 수 있겠다는 것에 대한 확신. 결론은, 나만 잘하면 된다. 잘하고 싶었다.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고 지금까지 노력해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게 경연 순간에 집중 또 집중. 경연을 하면서 작은 실수나 아쉬운 구간들이 유난히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왜 그런 실수들이 나왔는가 생각해 보면 결국 노래를 하는 순간 노래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심사위원, 깔려있는 카메라와 수많은 제작진, 출연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노래가 아닌 그 외의 것에 생각이 흘러가는 순간 생기가 있던 노래가 풀이 죽는 걸 느낀다. 그러니 집중해야 한다.
경연날, 노래의 길은 방향이 잡힌 것 같은데 기타가 나오면서 터지는 부분에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해 보였다. 어쩌지 고민하면서 지나가던 보훈이에게 물어봤다.
”여기 터지는 구간에 기타를 어떻게 쳐도 어색해보이는데 어쩌지?“
”형 여기 이렇게 해봐요“ 보훈이가 그 구간에서 힌트를 줬다. 이렇게 공연의 전체 그림은 촬영 당일날 완성. 정말… 세상 살이 혼자 힘으로 하는거 하나도 없다.
그렇게 어찌어찌 경연이 끝났다. 정작 경연 당일은 기억이 많이 없다. 방송을 보면서 내가 저랬구나 한다.
그렇게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하하. 나도 신기했다. 되는구나. 앞으로도 이런 마음으로 하면 되는 건가 보다. 지금처럼 멋지게 잘 만들어가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갔다.
그렇게 끝난 감사한 하루.
오늘은 경연이 잘 끝났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