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R
“자 6라운드 미션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라운드는 신곡 미션입니다”
신곡? 오, 그럼 곡을 써버리면 되니까 선곡도 곡에 맞춰 편곡을 안 해도 되고 좋다. 내 이야기 잘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오호 이렇게 난 또 발전을 하겠군…. 혼자 기대감 가득한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저희가 작곡가들에게 여러분 각자에게 맞는 곡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정해진 곡을 부르시면 됩니다”
아…
맞다. 이건 노래 실력 뽐내기 대회다. 편곡, 선곡 대회가 아닌 노래를 잘해야 하는 대회.
나는 내가 쓴 노래를 주로 불러서 다른 이의 곡을 부르는 걸 어려워한다. 어디 나뿐만이겠나. 그러다 보니 작가가 의도한 감정이나 표현을 내 것처럼 부르건 나에겐 참 어려운 일. 그래도 지금까지 어떻게 어떻게 매 라운드 잘 넘어왔으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을 가지고 작곡가님과 첫 만남.
“I love you~ I love you~ 흔한 노랫말~”
아…
하하.
내가 제일 자신 없는 발라드.
방심했다. 이번 라운드 경연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마인드를 통째로 바꿔야 했다. 지금 까지는 ‘내가 나를 잘 담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곡들을 선곡했다면,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완곡조차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데모를 듣는데 현규가 감정을 엄청 뱉으면서 애절한 감정과 함께 노래했다. 싱어게인2에서 현규가 오르막길 부르는걸 보고 너무 잘해서 혼자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스타일과 방식. 선생님이 누군지, 연습을 어떻게 해왔는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현규가 불러 놓은 발라드를 내가 불러야 했다.
솔직히 조금 속상했다. 지금까지는 나에겐 선곡, 편곡, 노래 이 세 가지의 조합이 중요했다. 그리고 매 라운드 제작진이 엮어준 나의 이야기들이 선물 같아 감사했다. 하지만 이번 라운드는 솔직히 불평을 좀 했다. 나와 간극이 있는 이 곡을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퍼즐을 풀어가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
“곡이 너무 어려워요… 제가 이 곡의 감정을 공감해서 잘 부를 수 있을까요…?”
“보니까, 이삭 씨가 대차게 안 차여봤네” 화기애애한 스튜디오.
이 곡은 대차게 차인 사람이 부를 수 있는 곡인가 보다. 대차게 차인다는 게 무엇일까? 얼마나 잘못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대차게 차일 만큼 잘못한 적이 있나? 상대방이 나에게 바람을 피거나 사기 정도는 쳐야 대차게 차이는 게 아닐까? 찰지게 뺨 한 대 정도는 맞으며 하는 이별인가? 이런 영양가 없는 잡초 같은 생각만 불쑥불쑥 자리를 잡는다.
아…
흐하하.
도망갈까.
때마침 사라져 버린 반쪽짜리 기대감 따라 나도 사라져 버릴까.
아, 근데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묘했다. 정면 돌파 밖에 이 상황을 파훼 할 방법이 없으니 오기가 생기는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99퍼센트였다면, 저기 내 맘속 한구석에서 희열의 감정 하나가 올라온다. 이 산을 넘으면 분명히 노래 실력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어쩌면 촉.
들키고 싶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다. 지금 상황에서 변태같이 이런 긍정적인 감정이라니. 내 촉은 안 믿기로 한 것 아니었던가.
노래를 연거푸 들어보고 불러본다. 나의 기술력과 정서 전달력에는 이 노래를 해석 할 수 있는 기능이 전혀 없어 보인다. 어차피 며칠 후엔 음원 녹음을 위해 작곡가님을 만나니까 그때 판가름이 나겠지 싶어 이래저래 혼자 머리 싸매며 연습을 한다.
노래를 부를 땐 나는 종종 Sting 아저씨를 생각한다. 이분은 어떤 노래든 자기 노래처럼 익숙하게 한다. 60년대 그레고리안 성가부터 요즘 팝까지 어떤 장르에도 잘 어울린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Sting 아저씨는 이것도 잘 부르셨겠지… 그런 생각과 바람이 나에게 있으니 이 장르도 한번 잘 해보기로. 알려뷰, 친해져 보자. 제발.
며칠 후 작곡가님과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다.
“생각보다…. 좋은데요?” 노래를 녹음하기 시작하는데 반응이 긍정적이다.
“아, 괜찮나요?”
”이삭 씨 방식대로 편하게 불렀을 때가 좋아서. 이 방향으로 가도 될 것 같아요“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갔다. 사실 기억이 선명하진 않다. 다만 작곡가님이 노래 잘 부른다고 한 말을 내가 잘 믿지 않은 기억은 선명하다ㅋㅋ. 이런 긍정적인(?) 대화가 오가며 음원을 녹음 했고 녹음을 하면서 이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길을 조금씩 찾아갔다. 명불허전이긴 했다. 작곡가님은 나도 모르는 내 목소리의 좋은 요소들을 사용해 이 곡에 어울리게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 녹음을 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난 이 곡을 제대로 부르긴 힘들었을 거다.
녹음이 끝나고 변태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조금 더 커졌다. 여전히 부정하고 싶은 감정.
나는 ’프리솔로’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암벽 등반가 Alex Honnold가 미국의 요세미티를 프리솔로로 오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등반을 하기 위한 연습 과정이 기억에 유난히 남는다. 그들이 정한 루트의 시작부터 정상까지 양손 양발 하나하나 어느 순서로 어느 위치에 둘지 연습을 하고 암기를 한다. 왜냐하면 수백 미터 높이의 암벽에서 손 하나 발하나 잘못 짚으면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연습은 곧 생명줄과 같은 것.
6라운드에서 만난 이 곡이 나를 죽이고 살리진 않겠지만 적어도 한줄 한줄 암벽 등반을 준비 하듯 하나하나 뜯어서 어떻게 부를지 분석 했다. 그리고 맘에 들 때까지, 생각한 대로 표현이 될 때까지 연습 또 연습….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 감정을 쏟아내기까지 감정의 서사를 끝까지 쌓아서 터트리는 전략을 짰다. 그리고는 내 생각대로 감정이 흘러갈 수 있는 발성의 방향을 연습 또 연습.
신호를 찾아갔다. 능력자 8호다. 아니, 0호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1년 전쯤 부터 신호에게 레슨을 받고 있다. 수억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들도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 코칭을 받는다. 슛을 하는 자세도 바꾸기도 하고 체력을 늘리기도 한다. 노래라고 그러지 말란 이유가 없다. 계속 배우다 보면 지금보다 노래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임명한 나의 코칭스태프. 매 라운드 마다 디테일을 잡고 노래에 대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던 좋은 동료다. 8호에게 연습한 것들을 확인하고 계속 연습. 불안하고 어려울수록 그냥 계속 붙드는 수 밖엔 없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이기는 거랬다.
연습 할 때 상체 긴장이 잘 풀리지를 않아서 후렴에서 강하게 노래 할 때 어디선가 소리가 턱턱 막힌다. 아마 현장에선 더 힘들 것이 뻔했다. 일부러 상체를 비틀며 호흡을 조금 과하게 주니까 그 압력으로 후렴 부분 목소리가 어느 정도 나온다. 이렇게 부르면 약간 과호흡이 와서 정신이 띵 하다. 당장은 방법이 이거 밖에 없어서 일단 과호흡을 사용해 보기로 한다.
서서는 절대 못 하는 노래. 언젠간 서서도 불러보겠다. 연습하자.
경연 전날이 너무 무서웠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마음이 계속 위축 대서 달리러 나갔다. 지지 않겠다. 경연 당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리고 힘차게 출근.
등수가 결정되고 기분이 좋았다. 3등이라니. 아주 뿌듯했다. 유난히 마음의 굴곡이 심했던 6라운드라 느꼈지만 동시에 경연에서 처음으로 오롯이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던 라운드기도 했다. 미웠지만 감사했고 속상했지만 뿌듯했던 6라운드.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아찔하다. 어떻게 했지.
이제 마지막이다.
하아… 집중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